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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82)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(35) 장창국
46년1월14일 남조선 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동시에 미군정은 그때까지 방임해두었던 각종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렸다. 미군정장관 「러치」(Archer I. Lerch) 소장에 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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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81)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(34) 장창국
미군정당국은 45년말께부터 한국군창설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. 당장의 치안유지와 장차 한국인 정부수립에 대비하여 46년까지 총병력 4만5천명 규모의육·공군을 편성하고 5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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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80)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(33) 장창국
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학생들의 성분과 계급은 구구 각색이었다. 계급으론 중좌에서 하사관까지, 출신도 일군·만군·중국군등 갖가지였고 같은 일군안에서도 일본육사출신·학병출신·지원병출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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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78)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(31) 장창국
해방후 우리국군이 창설되는 최초의 조치는 미군정이 45년11월13일 군정법령 28호로 국방사령부(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Defence)를 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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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66)제79화 육사졸업생들(19)|장창국|광복군 계열
우리 항일 무장운동은 군대해산(l907년)후부터 시작되어 1단계는 국내에서의 의병운동, 2단계는 만주에서의 독립군운동, 3단계는 중국대륙에서의 광복군운동으로 진행됐다. 광복운동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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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60)-제79화 육사졸업생들 (13)
원래 조선인은 만주군에서는 장교가 될 수 없었다. 장교 자격 규정을 일계·몽계·만계(만주거주중국인)로 명문화해 놓았던 것이다. 그러나 1936년 홍은익장군이 관동군사령부에 전속와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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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49)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(2) 장창국
「우리는 장차 수립될 우리 조국과 정부에 충성을 다한다.』 따뜻한 봄날씨, 태릉의 한 벽돌건물안에서 신생 조국의 군장교가 되려는 건아들의 「애국선서」가 울려퍼졌다. 46년5월l일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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「6·25」 31돌을 맞아 본사 동서 문제 연구소 추적|납북 인사들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
올해로 6·25 동란은 설흔 한해를 맞았다. 동란의 비극 속에서 납북 또는 월북한 인사들은 얼마나 생존해 있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. 우리측이 끈질기게 주장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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미·이란 대결의 파문 어디까지(5)
중동최강을 자랑하던「이란」군이 회교혁명이후 거의 붕괴되어 지금「이란」은 군사력의불모지처럼 되어가고 있다. 친미「팔레비」정권은 군사제도와 훈련장비를 주로 미국에 의존하면서「이란」군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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『참정』겨냥한 궤도수정 일 공명당, 우경화 선언의 배경
일본의 중도정당인 공명당이 지금까지의 안보·국방정책을 크게 수정, 자위대의 존재와 미일 안보조약을 사실상 인정함으로써 보수진영쪽으로 기울었다. 이 같은 당 대회에서의 우경화 선언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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불타는 화랑혼|육사창설 30돌을 뒤돌아본다
「참되게 자라자, 배워서 이기자, 나라를 빛내자』-. 창설30주년을 맞는 육사생도들은 오늘도 이같은 교훈에 따라 인격과 지식을 연마하며 내일을위한 조국방패로서의 훈련을 거듭하고 있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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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1194)국립경찰 창설 제41화(32)
제주에서 일어난 4·3폭동사태는 정부가 수립된 지 두달이 되도록 진압되지 않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태를 불러왔다. 폭동진압이 늦어지자 정부는 그해 10월 여수에 주둔하고있던 국방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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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1186)| 국립 경찰 창설 (24)|김태선
4·3폭동이 일어나자 경무부에서는 김태일 경무관 (제3대 경찰 전문 학교장)을 총지휘관으로 경비과 작전 계장 최치환 총경 (전 경향신문 사장)을 작전참모로 현지에 파견, 진압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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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1185)국립경찰 창설|김태선(제자 김태선)
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제58군의 96사단 등 3개 사단과 1개 여단병력 총 6만 6백 68명을 배치했다가 패전하게되자 한라산의 진지와 막대한 무기·탄약 등을 땅에 파묻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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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군 25돌 맞은 「청년 국군」의 자화상|최강의 정예 4반세기
건군 4반세기-. 국군은 1일 창군 25주년을 맞아 4반세기 동안 피나는 시련을 극복하고 「청년 국군」으로 성장한 위용을 다시 한번 과시, 자주 국방의 임무를 재확인했다. 유아기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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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817)내가 아는 박헌영(134)|박갑동(필자 박갑동)
김삼룡이 정태식에게 시달한 지시는 「남로당 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건」이었다. 기한은 3윌25일까지였다. 남로당지하당의 남북통일안을 평양의 박헌영에게 보내는 것은 3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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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70)|「스탈린」의 죽음(4)|소련과 6·25(1)
「스탈린」이 죽기 전에 한반도 전체에 공산위성 정권을 세우려고 마음먹은 것은 대일 참전 때부터였다. 하긴 소련이 한반도의 부동항에 군침을 삼킨 것은 이미 제정 노서아 때부터이긴 했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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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93)창군전후(12)|이경석(제자는 필자)
미군정아래서 군대가 아닌 경비대로 발족한지 2년6개월이 지난 48년7월에는 5개 여단 15개 연대로 성장하여 장교 1천4백3명·사병 4만9천87명 등 모두 5만여명에 이르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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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92)창군전후(11)이경석(필자는 제자)
경비대의 초창기에는 갖가지 불상사가 일어났다. 그 중에도 사병들이 장교를 구타하거나 배척한 이른바 하극상사건이 많았으며 한국장교와 미군간의 충돌도 적지 않았다. 제3연대장 김백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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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91)창군전후(10)|이경석(제자는 필자)
경비대가 창설되면서 계급칭호와 계급장·휘장 등의 제정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. 그 중에서 계급 칭호는 적잖은 산고를 겪었다. 일본군 출신의 일부에서는 그들의 몸에 밴 소위 중좌 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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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90)창군전후(9)|이경석(제자는 필자)
군정청은 46년1월14일 국내치안 유지를 위해 당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설치하고 다음날 태릉 현 육사자리에서 제1연대1대대A중대를 발족시켰다. 미 주둔군사령관 「하지」중장은 남한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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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89)창군 전후(8)|이경석(제자는 필자)
이형근 채병덕 유재흥 장석륜 정일권 양국진 등 6명은(군번 순) 군사 영어 학교에 입교하지 않고 정위(대위)로 맨 처음 임관됐다. 경비대 창설의 중대장 요원으로 특채한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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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88)창군전후(7)|이경석(제자는 필자)
군사영어학교는 이름 그대로 군사영어의 교육을 위주로 했으나 한국인교관들은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관한 사상강의도 많이 했다. 그 당시야말로 정치 지도자들이 좌우익으로 나뉘어 다투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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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87)창군전 후(6)|이경석(제자는 필자)
미 군정청은 한국군을 창설하기에 앞서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. 군정청의 국방 당국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통역관을 찾았으나 쉽게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.